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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for the '2010.02' Category
  • 강필웅 공공미술사 (조선의 공공미술 1)

    pilung  Public art / 2010.02.23

    조선의 공공미술 제 1 화 - 건국과 미술 그리고 경복궁의 해태상



    조선시대는 태조 이성계의 건국에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519년간을 가리킨다. 국가의 지도이념으로 불교를 삼았던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숭상하여 그 전까지의 문화와는 현격한 차이를 드러냈다. 즉, 이 시대를 시종일관 지배했던 억불정책은 당시의 문화를 검소하고 실용적이며 소박한 성격의 것으로 발전하게 했다.

    이 점은 미술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교를 숭상한 저선은 불교적이고 귀족적인 성격을 탈피하였다. 사찰 중심의 건축 미술은 궁궐 중심으로, 불교 중심의 회화는 남종화풍의 담담함으로 변모되었다. 초기에는 안견, 강희안, 이상좌등이, 후기에는 정선, 심사정등의 화가가 전통 화가가 전통 회화의 발전에 기여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서민생활을 다룬 풍속화와 민화가 많이 그려졌다.

    서민적이고 순박하던 조선 미술의 특징은 도자공예, 목죽공예, 칠기공예등의 생활용품의 발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조선왕조 시대의 미술은 대체로 고려시대의 귀족적인 정서와는 달리 민족적인 정취를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조선시대의 미술 중에서도 특히 발달했던 것은 회화와 도자 공예 및 목칠 공예, 그리고 목조 건축 등이 있다. 그중 현대의 공공미술관 땔 수 없는 건축을 살펴보면 궁정 건축을 비롯한 성곡, 문묘, 서원, 사원, 객사 등등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그러나 대부분이 임진왜란, 병자호란의 양란 때 타서 없어지고 지금 남아있는 것은 대개 조선 후기의 건물이다. 조선 시대 건축은 고려시대 건축에 비하여 대개 장식이 번잡해지고 구조가 육중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으며, 지붕선의 아름다움, 창살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디자인의 발전은 조선시대 건축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남대문과 개성의 동대문이 있고, 후기를 대표하는 것으로는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비원의 연경당이 있다.

    조선을 대표하는 건축물 경복궁에는 유난히 해태상이 많다. 그 이유는 조선왕조의 역사에는 왕과 신하들 간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왕의 힘의 부족했을 때에는 신하들의 강요로 사랑하는 왕비를 내쫒는 일도 벌어진다. 대원군은 쇠약해진 국력을 키우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경복궁 중건을 무리할 정도로 강행하였다. 그래서 궁궐 정문 앞에서부터 해태를 배치하여 신하들의 기를 죽이려 했던 것 같다.



    해태(시비,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는 해치라고도 하는데 머리에 뿔이 하나 있는 동물로 성질이 곧아서 잘못한 사람을 뿔로 받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깨문다고 한다. 그래서 관리의 부정과 비리를 탄핵하는 사헌부 관리의 흉배에 해치를 넣었고 해치관을 썻다 한다. 광화문 앞을 지키는 해태상은 뛰어난 공공미술로 볼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제과회사 심벌로 쓰이는 등 조금은 신선미가 떨어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조각 솜씨가 범상치 않고 조형미가 뛰어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본 작품은 당대 최고의 조각가가 최고의 기술로 제작한 작품으로 이 해태상 앞에서는 왕을 제외한 어떠한 신하라도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던 조선시대 왕권의 상징이었다.경복궁 근정전과 근정문의 계단에는 왕만이 다닐 수 있는 구역이 있다. 중심에 사각 답도가 있고 좌우에 두 마리 해태를 배치했다. 계단석의 전면에 당초문을 조각하여 품격을 높였다. 그렇다면 동시대 공공미술에서 어떤 작품이 해태상의 형태를 가지고 있을지 생각해 보는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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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 공공미술사 연구 1

    hjkim  Public art / 2010.02.23


    고려시대 공공미술사 연구 1
    <석불>

    불상은 부처, 즉 깨달은 자를 조형적인 형상으로 표현한 상이다. 또한 넓은 의미로 불교와 관련된 모든 상이 포함된다.
    그중 석불은 돌에 새기거나 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불상으로 주로 야외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지금도 석불이 있는 곳에서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석불은 지금의 공공미술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였다. 오히려 석불이 세워짐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찾게 되는 상징적인 공간을 만들어냈다. 석불이 있는 곳은 많은 이들이 무언가를 바라고 기원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이 모이고, 그곳에 모인 많은 이들이 한마음이 되어 자신의 소망을 바라는 장소가 되었다. 결과적으로 석불은 그곳을 찾은 많은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안정감을 제공해 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더군다나 고려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나라였기 때문에 고려의 석불을 지금의 공공미술의 개념으로 본다면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가장 이상적인 공공미술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덕주사에 있는 마애불상이다.
    송계리 산 1번지에 있는 이 마애불은 폭 5.4m, 얼굴길이 3.37m를 포함하여 길이가 14m이며, 귀의 길이가 1.85m, 발의 길이가 7.5m나 된다. 이 거대한 불상은 화강암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마애불은 마의태자(신라의 마지막56대 경순왕의 아들)의 누이인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이곳에 들어와 있다가 자기의 형상을 마애불로 조성하였다고 전해지며 마의태자가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덕주사에서 남쪽방향(지금의 수안보면 미륵리)에 일시 머물면서 누이동생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누기 위해 근처 미륵사 사원에 와서 석굴과 불상을 조영하였으며, 우연인지는 모르나 이 마애불과 미륵리 석굴(미륵당)의 석불이 서로 마주보도록 조성되어 있어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로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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